with GIO JU

삶, 부토 이야기
“언어를 찾지 못하는 속내
말로는 다하기 힘든 이야기들
몸으로 듣고 춤으로 말하며
나 조차도 다 알아채지 못했던
삶의 깊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INTRO
삶은 자주,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말로는 다 담아내지도 못합니다.
그런 것들이 여기 저기서 내 몸을 눌렀습니다.
물에 젖은 아주 무거운 외투처럼.
나는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그 외투를 벗는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노력이 부서질 때마다 자기 포기와 파괴가 나를 찾아왔고
나는 내 몸과 영혼이 아주 아프다, 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참고 참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경계의 끝에서
내 삶은 양자 도약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삶과 완전히 다른,
뜬금없는, 이해불가한 도약.
그 도약의 착지점에서 춤을 만났습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춤. 그곳에서 몇 년간 미치도록 춤을 췄더니
어느 새 내 무거운 외투는 바짝 말랐습니다.
그리고 처음 보는 옷들을 마주하며 계속 춤을 췄습니다.
나이 사십이 가까워지는 어느 날,
내 인생의 챕터가 완전히 바뀌었구나, 실감하면서.

우리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행위를 할 때 그 모두를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왜 이런 생각을, 내가 왜 이런 행동을?
저의 경우, 20대 내내 불같은 어떤 에너지가 내 안에서 넘치는데 나는 그것을 어떻게 써야하는 지 몰라 많이 헤맸습니다.
춤은 일상적 언어 소통을 넘어 잠재의식의 언어, 비가시적 영역과의 접촉, 머리로 이해할 수 없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삶의 어떤 지점과 접속할 수 있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교감 행위입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 이르기까지 춤은 사회적 잣대와 필요에 따라 한정되며
있는 그대로의 삶에 접속하고 교감하는 춤은 쉽게 찾아지지 않습니다.
아름답든 아니든 웃기든 슬프든 고통스럽든 행복하든 꽃이 피면 지고, 지면 다시 꽃이 피듯 희로애락과 자연의 순리를 있는 그대로
무언의 언어인 춤으로 표현하고 나눌 수 있다면, 아파도 아프다고 표현할 수 없었던 몸과 영혼은 숨통이 트일 것 같습니다.
손아귀에 쥔 힘이 탁 풀리며 손가락 사이 공기와 바람을 느끼듯 편안하고 부드럽게 휴식을 취할 것 같습니다.
2010년 우연히 부토를 만나 단번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로부터 15년간 내 삶의 방향, 그 중심에는 항상 부토가 있어왔고 탐구하면 할수록 이 과정은
관객으로서 공연을 보는 것보다 직접 경험할 때 엄청난 힘을 보여주는 것을 실감하며 공연보다는 워크숍 혹은
참여형 공연에 집중해왔습니다. 부토는 무엇이길래 이토록 파워풀하게 삶을 흔들어놓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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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토(BUTOH 舞踏)는
부토(BUTOH)는 1960년대 일본에서 시작되어 유럽으로 확산, 지금은 전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스타일, 방향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BUTOH는 서양의 현대 무용을 넘어서기 위한 사실적 몸짓이었다.
부토의 창시자 타추미 히지카타는 현대 무용이 요구하는 몸의 형태와 춤의 방식을 거부했고 1960년대 초기 대학가에서 금기를 추는 혁명에서부터 O자 모양의 다리를 가진 시골 농부, 미나마타 병을 앓는 몸, 죽은 누나의 영혼과 공명하며 춤을 췄다.
또 다른 창시자인 카즈오 오노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고통과 희생된 영혼들과 교감하는 춤을 추기도 했다. 초기 부토는 일본의 전통 연극의 영향으로 절제된 움직임과 하얀 분장, 금기를 깨는 행위 예술로 호불호가 분명하고 일본에서도 비주류이다. 지금은 일본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초기 부토의 보편적 정신과 철학을 바탕으로 지역적 특색, 예술 장르를 복합, 다양한 독창성으로 발전하고 있다
우리가 만날 부토(BUTOH 舞踏)는
자연의 순리를 편견없이 몸으로 마주하는 여정
현대 무용이 하늘을 향한다면 부토는 땅을 향한다.
땅은 태어남과 소멸, 재탄생의 근원이다. 부토는 자연의 순리를 구분하지 않고 춤춘다. 삶과 죽음, 빛과 어둠 사이 생각과 구분, 판단을 내려두고 자연의 한 원소가 되어 무엇이 오고 가든 몸으로 마주하며 춤춘다.
일본에서 부토가 시작될 때 ‘어둠의 춤’ ‘그림자의 춤’ ‘죽음의 춤’으로 일어났다. 어둠과 그림자, 죽음이 불편하다면 그것은 우리 안의
이중적 판단을 보게 한다. 빛과 어둠은 공존하고 그림자가 뚜렷하다는 것은 빛이 강하다는 것이고 죽음은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사회가 눌러버린 어떤 어둠과 그림자들이 반작용으로 튀어오른 것이 부토가 아닐까 한다. 나에게 어둠은 미지이다(unknwon).
그것은 제대로 마주한 적이 없기에 미지이고 어둡다.
회피하지 않고 삶을 순수한 완전체로 마주하며 땅의 생명력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것이 나에게 부토이다.
겨울의 끝에는 봄이 성큼 와 있고 슬픔의 끝에는 기쁨이 기다리듯
모든 것은 공존하며 공명한다. 왔다 갔다 변화하며.


춤추는 별을 잉태하는 혼돈
부토의 처음은 낯설다. 불편할 수 있다.
그리곤 자유롭다. 더 깊이 들어갈 수록 혼돈을 마주하기도 하고 우리 자신의 안전막을 깨는 치열한 몸짓이 찾아오기도 한다. 춤으로 우리 안의 취약성, 두려움, 불안을 마주한다.
혼돈은 창조를 낳는다.
부토는 반복되는 일상에서 찾기 힘든 새로운
창조성을 탐구하는 자극이 된다.
부토 춤의 미학은 무엇이 어둠이고 무엇이 아닌 지에 대한
이분법적 판단을 뛰어넘는 혼돈의 공간에서
처음 만나는 아름다움으로 꽃을 피운다.
“내면의 혼돈은 춤추는 별을 잉태한다.” (니체)
슬픔과 고통이라는 손님이 방문할 때
그 손님을 안내할 수 있는 몸의 공간

현대 무용이 하늘을 향한다면 부토는 땅을 향한다.
땅은 태어남과 소멸, 재탄생의 근원이다. 부토는 자연의 순리를 구분하지 않고 춤춘다. 삶과 죽음, 빛과 어둠 사이 생각과 구분, 판단을 내려두고 자연의 한 원소가 되어 무엇이 오고 가든 몸으로 마주하며 춤춘다.
일본에서 부토가 시작될 때 ‘어둠의 춤’ ‘그림자의 춤’ ‘죽음의 춤’으로 일어났다. 어둠과 그림자, 죽음이 불편하다면 그것은 우리 안의
이중적 판단을 보게 한다. 빛과 어둠은 공존하고 그림자가 뚜렷하다는 것은 빛이 강하다는 것이고 죽음은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사회가 눌러버린 어떤 어둠과 그림자들이 반작용으로 튀어오른 것이 부토가 아닐까 한다. 나에게 어둠은 미지이다(unknwon).
그것은 제대로 마주한 적이 없기에 미지이고 어둡다.
회피하지 않고 삶을 순수한 완전체로 마주하며 땅의 생명력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것이 나에게 부토이다.
겨울의 끝에는 봄이 성큼 와 있고 슬픔의 끝에는 기쁨이 기다리듯
모든 것은 공존하며 공명한다. 왔다 갔다 변화하며.

우리안에 품고 있는 다양한 존재를 찾으며
변신과 순환의 춤 으로
우리 몸의 세포는 땅 아래서 오랫동안 발아를 기다리는 씨앗같다.
세포는 실시간으로 생성되고 소멸되기를 반복하며
현재의 몸 뿐 아니라 자연, 지구의 역사를 품고 있다.
우리 몸이 담고 있는 수많은 씨앗의 꽃을 피우는 과정이 부토이다.
꽃은 존재의 상징이다. 꽃은 피고 지기를 반복하며
우리 자신의 변신과 순환을 형상화한다.
그렇게 우리는 춤으로 지구상 모든 존재와 공명한다.
늙음과 죽음, 아픔과 장애, 폭력과 편견 앞에서

춤으로 마주할 수 있다면. 늙음의 춤을 추고 아픔의 춤을 추고
장애와 비장애, 나와 타인, 다양한 구분의 ‘사이’에서
경계를 흐리며 춤으로 그 사이 공간을 마주할 수 있다면.
부토는 어떤 신체 조건에서도 삶의 춤꾼이 되도록 안내한다.
많은 부토 스승들이 40살이 넘어 춤을 시작했고 부토 창시자 카즈오 오노는 손과 얼굴의 주름을 춤으로 추며 100살까지 대중앞에서 공연했다.
워크숍에 나이가 많은 이들이 함께 할 때 그 공간은 훨씬 깊어진다. 세월이 자연스레 만든 몸짓이 모두에게 여운을 남기며

나와 타인 사이, 다른 존재 사이
관계의 확장
나라는 사람은 상대가 누구인지에 따라, 어떤 상황에 있는 지에 따라 다르게 반응한다.
다양한 조건을 제시하며 인간 관계, 자연 속에서의 관계 등 다양한 관계의 패턴을 탐구하며 존재의 확장을 가시화한다. 우리 안에 숨은 다양한 캐릭터를 만나는 즐거움과 호기심도 함께 있다.
워크숍 참가자들이 자신의 삶을 춤출 때 나는 항상 놀란다.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니. 그렇게 그룹 속에서 서로 배우고 지원한다.
그리고 그렇게 춤을 추고 나면
더 크게 활짝 웃는다. 참 자유롭다.
워크숍 흐름
# 몸
우리는 몸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몸은 우리의 삶을 함축하고 있는 프레임이다. 몸을 통제하는 마음을 내려놓자. 몸에 쌓인 긴장을 풀어주자. 자연스러운 움직임 속에 어느 새 몸과 마음은 하나로 녹아 내린다.
생각의 스위치를 끄면 무한한 삶의 신호들이 몸의 안팎에서 깜박인다.
판단 없이 순간 순간, 몸으로 들으며 움직임의 흐름을 타자. 어떤 움직임이든 몸이 춤추게 두라. 몸은 그 자체의 언어를 품고 있다.
무엇이 오고 가든 삶이 춤추게 두라. 고요하게 그 춤들을 마주하자.
<워크숍>
다양한 컨디셔닝을 통해 움직임 속에서 일상의 생각 모드에서 잠재의 몸 모드로 전환한다. 몸/움직임/이미지/소리/상상/관계/세상/알아차림의 8가지 채널을 몸 안팎으로 열면서 Medi-Motion(명상적 움직임), Resonance Touch(공명의 터치), 개인-그룹 리서치 등을 참여자 개개인들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알아차리며 경험의 공간을 열어간다.
“Life is the dancer and you are the dance.” - Eckhart Tolle
(삶이 댄서이고 당신은 그 춤이다.)
# 춤
우리의 삶은 서로 비슷한듯 하지만 같은 삶은 없다. 내 삶의 오늘은 어제와 같은 것 같지만 고정불변인 시간은 없다. 일상에서 알아채지 못하지만 우리 몸과 삶은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일상의 생각과 언어로 다 감지하지 못하는, 쉼 없이 오고 가는 삶의 흐름이 춤이 되는 예술이 부토(BUTOH)이다. 부토는 구분과 편견을 넘어 우리의 삶을 바라보는 또다른 시선을 열어주는 몸짓이다. 심연에 가라앉은 기억, 감정과 꿈, 그리고 타인, 세상과의 관계, 삶의 비밀과 신비, 숨은 이야기들을 몸을 통해 듣는 법을 경험한다. 그렇게 삶을 들으며 자신만의 춤을 찾아내는 것이 부토이다.
<워크숍>
부토는 몸의 다양한 조건들과 있는 그대로 공명한다. 나이, 신체 조건 등에 따라 자신의 몸에 맞는 유기적 스트레칭을 찾도록 돕는다. 이 속에서 몸의 긴장을 덜어내고 몸이 가장 편안한 순간을 맞게 한다. 부토는 몸 전체의 움직임 뿐 아니라 각 부분의 움직임을 활성화한다. 몸의 모든 부위는 각 부위에 고유하게 각인된 기억들과 함께 춤추는 곳이다. 발의 춤, 얼굴의 춤, 눈의 춤, 손과 등, 목과 머리, 귀와 어깨... 몸의 각 부위를 안팎으로 탐구하며 고유의 움직임을 발견한다. 이 속에서 기억들의 엉킴이 풀리는 과정을 통해 우리 안에 숨은 이야기, 자신만이 출 수 있는 삶의 춤을 발견하게 된다. 이 과정은 어떠한 춤의 경력, 신체 조건도 제한받지 않는다.
부토는 [무답]舞踏 의 일본 발음이라고 하는데 춤출 ‘무’에 밟고 가다의 ‘답’이다. 땅을 밟고 삶을 걸으며 추는 춤이 부토이다
# 자화상, 거울의 너머
타인에게 내 모습은 어떻게 비칠까 생각하며 거울을 본다면, 부토는 또 다른 거울을 건넨다.
거울에 비치는 얼굴 그 너머, 우리 안에 봉인된 수 많은 표정과 감정, 몸의 언어를 비추는 거울. 그리고 거울의 뒤편, 보여주기 싫고 그림자로 따라 다니는 어떤 모습과 이야기들에 포용의 빛을 비춘다. 부토의 미학 중 하나는 새로운 아름다움의 발견이다. 아름답고 추함의 기준은 누가 만들었던가? 서로 다른 조건이 왜 가리고 없애야할 대상이 되었던가? 부토는 방향성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누르고 가려왔던 것들에 숨 쉴 기회를 제시한다. 발산하기 어려운 어떤 것들, 하지만 우리 안에서 공존하고 있는 것들에 조심스럽고 안전하게 공간을 내어준다. 그것이 무엇이든 무조건 거부당하기 전에 그 자체로 마주하며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변신할 수 있는 창조적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 안에 깊이 뒤틀려 있는 고통은 역전(Reverse)되고 해소되어 풀려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GIO JU

2010년부터 길 위의 삶을 시작했고 춤과 함께 다양한 공간이 집이 되고 다양한 사람들과 협업해왔다. 인도를 중심으로 아시아와 유럽을 오가며 스승을 만나고 협업을 해온 모든 시간들은 문화와 국적, 언어의 경계를 넘나드는 복합적 성장의 과정이었다.
2010년 북인도 다람살라에서 우연히 부토 학교를 만나 이곳에서 5년간 훈련과 리서치를 진행했다. 동시에 부토의 다양한 흐름을 찾는 여행을 멈추지 않았는데 이 과정에서 부토 마스터 Yumiko Yoshioka에 의한 실험적 댄스 컴퍼니 ‘Ten Pen Chii’(2013, 베를린)의 무대에 참여하며 부토 댄서로의 공개 활동을 시작했다.
다람살라의 부토 학교와 유럽에서 워크숍을 촉진하며 나 자신의 고유의 부토, 춤을 파고들 수 있는 협업 여행을 계속해왔다. 특히 댄스 컴퍼니 ‘14th Baktun’(2014, 캐나다)에서 마야 문명을 춤으로 탐구하며 신화와 역사를 여행하고, 해마다 다람살라를 비롯 인도의 Shiv Nadar University(델리), Culture monks(콜카타) 등 다양한 도시에서 인도 특유의 문화와 부토가 만나는 지점을 탐구하고 있다. 2018년부터 헝가리의 Para dance company와 ‘Butoh in Wheelchair’를 진행, 서로 다른 신체적 조건의 참여자들과 함께 장애와 비장애, 경계 너머의 공간을 찾고 있다. 코로나 시기에는 세계 곳곳의 부토 예술가, 다원 예술가들과 함께 온라인 미디어가 예술의 감각을 어떻게 확장할 수 있는지 실험했으며 (감각력의 차원들 프로젝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지원) 2021년부터 타이완 컴퍼니 Hu chia theater와 아시아 부토 네트워크 협업을 진행하고 있다. 2022년부터 아이슬란드의 국제예술 레지던스 전시 ‘Oceanus’에 속해 다양한 장르의 예술과 부토의 협업을 실험하고 있다. 지금도 부토와 함께 길 위에 있고 남인도에서 자연의 색과 천연 직물로 한국 전통의 옷을 모티브로 한 소박한 옷을 짓고 있기도 하다.